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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리의 Brunch ]/새아리의 호주 생활 일기장

#9 호주 한식당에서 일한 1년 : 매니저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by 새아리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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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에서는 이제 내가 어쩌다 매니저가 되어서 하게 된 뻘 짓들을 열거해 보겠다. 여기서 일하면서 내가 블로그를 운영할 수 없을 만큼 시간적 여유와 심적 여유를 모두 빼앗겼었고, 운좋게 퇴사하여 현재는 비교적 백 배정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건 너무나도 개인적인 경험이고 그때는 나도 퇴사고 뭐고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때라, 그냥 워홀 온 친구가 오랜 시간 더러운 경험 하나 했구나 하고 네이트판 썰 보듯이 가볍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사실 같이 일하던 친구가 헤드쉐프가 되던 시점에 락다운이 터졌고, 모두가 시프트가 줄고 점주는 인력 감축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그 친구가 나와 일하기를 원한 덕분에 락다운때 시프트 감소 없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다. 다른 일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우스 키핑 잡을 하던 내 동생은 페인트 일을 구해야 했다) 친구를 도와 주방 설겆이와 튀김요리 등을 도 맡아 하게 되었고, 배달 주문을 받고 포장하는 일을 하면서 매출을 높이기 위해 홍보물을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딱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만들었던 포스터. 상호명을 가리기 위해 윗부분은 잘라냈다.

누가 시켜서 한 건 아니고, 헤드쉐프인 친구가 일에 열정이 많았다. 3년 전에 한국인 사장과 중국인 사장의 동업으로 개업하게 된 식당이었는데, 두 사장의 불화 + 체계적이지 않은 매니지먼트 + 일정하지 않은 음식의 퀄리티로 손님은 가면 갈수록 줄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간에 두 사장은 서로 소송을 걸었고 중국인 사장의 압승으로 한국인 사장은 그대로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래서 친구는 본인이 음식에 좀더 신경을 쓰고 홍보와 매니지먼트를 개선하여 마치 자신의 가게처럼 영업에 열과 성을 다했고, 어려운 시기에 나를 도와준 친구이니만큼 나도 최선을 다해 이 친구의 목표를 도달 할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 그리고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비즈니스가 살아나는 과정이 눈에 보여 꽤나 재미있기도 했다. 딱봐도 리뷰도 좋지 않고 단골 손님이라고는 술먹는 한국인밖에 없는 매장에 외국인 손님 비율이 90퍼센트 이상 차지하는 것을 보기까지, 이태원 클라스를 보고 난 뽕이었을까 그냥 뭐 내 꿈은 아니었지만 친구가 너무나도 일에 열성인게 눈에 보였고, 나도 평생 동안 내가 언제 이런거 해보겠어 하는 생각에 뭐든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코로나 락다운때 배달 픽업 전용 메뉴로 1주일에 한 번씩 포스터를 만들어 올렸는데, 그 중 인기가 좋았던 메뉴였다

여기 올리는 포스터들은 다 내가 직접 만든 포스터다. 친구가 판매할 세트 메뉴를 구상하여 음식을 만들어 주면 내가 사진을 미친듯이 찍고 편집해 포스터를 만들어 냈다. 이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고, 특히나 위 포스터를 만든 주에는 세트 주문이 미친듯이 들어와 드라이버를 4명이나 고용했었어야 했다. 그땐 정말 중국인인 사장 부모님까지(영어 안 통함) 총 동원해서 배달 주문을 받았다. 여기 올린 것 말고도 내가 만든 포스터와 메뉴들이 훨씬 많은데, 다 올릴 수 없으니 조금만 첨부하겠다.

저렇게 하루종일 일에 몰두하여 시간을 쏟다보니 차라리 가게와 가까운 중국인 사장집으로 이사오라는 제의가 들어왔고, 나는 그 후 1년 동안 사장과 헤드쉐프 친구와 함께 그 집에 살게 되었다. 사장님이 집 청소를 거의 안하는 편이라는게 정말 큰 흠이긴 했지만, 일하느라 어차피 집에 오래 있을 시간도 없고 뭘 만들어 먹을 시간도 기회도 없었다. 그냥 내 커피 장비를 몇 개 두고 커피를 아무 때나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점으로도 만족했다. 이 집에 들어오게 되면 더욱이 노예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방값이 상대적으로 쌌고 (보증금 없이 주당 150불 이었다) 방 퀄리티가 가격에 비해 너무 좋은 곳이어서 지금 생각해도 그 집에 살았던 건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직하면 이사해야 하는 것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건 다시 매장을 dine in 오픈하면서 만든 메뉴와 배달 전용 take away 메뉴이다. 만드는데 참 공을 많이 들였다.

오랜만에 주루룩 내가 만들었던 것을 보면서 나는 왜이리도 열심히였나 화가 조금 나려고한다

매니저 일을 하게 되면서 이제 다시 돌아오는 직원들의 로스터 관리와 전반적인 매장 관리를 하게 되었었는데, 경력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린 관계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한국인 언니오빠들은 항상 무언가 나를 잡아먹고 싶어했다. 잡아 먹는다는 표현이 거북할 수 있겠는데, 그 표현 말고는 딱히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개인 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이 때문에 일하는 1년 동안 자존감이 정말 많이 떨어졌었고, 나는 저 사람들보다 무엇을 더 잘해서 매니저가 되었지? 내가 차별화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메뉴 만드는 부분에 공을 들였던 것 같다. 그 사람들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은 나름 많이 했었는데, 있었던 일이 하도 많아서 좋은 기억은 없다.

시프트 끝나고 집가서 틈틈히 메뉴판 만들던 시절

물론 이 콘텐츠에 대한 배상은 단 1원도 받지 못했다. 봉사라고 생각 한 걸까, 매니저가 되어 이정도 밖에 일을 하지 않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압박을 이기지 못해 한 걸까. 그냥 다른 직장을 빨리 구했어야 했는데,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기가 무서웠고, 집을 이사해야한다는 사실도 크게 다가왔따. 가시밭길을 걷는 듯한 상황에서의 소속감이 주는 달콤한 안정감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아마 그러면서 점점 병들었던 것 같다.

친구는 고기 플레이팅에도 정말 열정이 많았는데, 위에 나무 팻말은 중국에서 주문하여 시킨 것이다. 일하면서 비록 많이 소실되었지만 손님들에게는 효과가 좋았다.

또 나는 줏대가 없는 편이었다. 줏대가 없다기 보다는 경력의 부재에서 오는 자신감 부족이라고 하는게 정확할 듯 하다.같이 일하는 친구가 워낙 성격이 쎈 편이기도 했지만,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조금 버거웠다. 자신있게 결과를 보장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반면 친구는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게 실패를 하던 성공을 하던 처음 자신의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자세는 이건 무조건 성공할거라는 기세로 시작을 했고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나는 보장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앞뒤 없이 막무가내지? 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편이라 많이 부딪히곤 했다.

뭐 포차 메뉴라고 하면서 요런것도 친구가 개발을 했었고 나는 또 열심히 메뉴를 만들었으나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칵테일 한다고 모히또도 만든적 있다. 맛은 기가 막혔음

내 친구는 머릿속에 가게 생각밖에 없는 듯 했다. 주말이면 사람이 부족해 혼자 프렙을 많이 해놨어야 했는데 잠도 거의 못자가면서 시험 준비하듯이 프렙을 했다. 그래서 주말에 오는 그 많은 손님들을 감당할 수 있었고 나는 걜 보면서 지금 내가 하는 노력은 노력도 아닌가 싶을 반성을 하기도 했었다. 이게 사람이라는게 그 상황속에 있으면 판단이 흐려지고 이렇게 가스라이팅 당하기 쉬운 어리석은 존재다. 나는 이미 받는 만큼의 두배를 하고 있었는 데 말이지.

사실 친구와 사장의 성격은 굉장히 똑같고 지랄맞은 편이었다. 둘이 사이가 좋을 때는 너무 좋고 잘 맞는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보였지만, 싸울때는 거의 공기를 히말라야 산맥 고도 3000미터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간에서 숨막혀 죽을 뻔 한 적이 좀 많다. 12월 말에는 정말 정신병 걸릴 것 같아서 2주 정도 쉰 적이 있고, 다시 복귀를 위해 돌아오고 조금 건강해 져서 돌아왔지만 서도 사람은 변하지 않기에, 그만 둬야겠다는게 답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친구는 나를 계속 붙잡았다. 내가 없으면 본인은 일을 못한다고.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내 성격상 참 눈에 밟혔다. 현재는 이런 내 성격을 지금 남자친구 만나고 많이 고치려고 노력중인데 그때는 그랬다.

백화점 다니던 언니가 자기도 일하면서 자살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냥 퇴사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때는 자살하면 모든게 끝이 날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어 계속 자살 충동이 들었다고 했다. 틀 안에서 빠져나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때때로 그 틀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게 깨지면 내 인생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그 2주 동안 사촌언니 집에서 머물면서 요양을 했다. 마음이 다쳐서 일을 쉰적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때 쉬었던 건 나에게 있어 참 잘 한 일이었다.

요건 추석에 서비스 한다고 친구가 만든거

1월부터는 사장님도 본인보다 내 친구가 가게 운영을 도맡아 하는 것이 낫다 싶었는지 둘이 계약을 하더라. 매출 순이익의 어느정도만 넘겨주면 나머지 이익금은 너네가 다 가지라고. 솔직히 나쁘지는 않았던 딜이었는데 4개월 해 본 결과 그렇게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친구가 가게 발전을 위해 이익이 나기도 전인 초반에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해 버렸기 때문이다. 둘 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시작한 딜이었기에 아무런 계약서 같은 것은 쓰지 않았고, 마지막에 친구는 투자한 돈의 반도 돌려받지를 못했다. 그게 미친듯이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워홀러 입장에서의 투자와 여기서 몇십년을 산 사람의 투자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장은 처음에 한 푼도 돌려주기 싫어했고 나중에서야 억지로 조금 돌려줬다.

Dine in 손님이 늘어나면서 가게 구조를 조금씩 바꿔 데코한 것. 레스토랑이 꽤나 넓은 곳이었는데 사실 친구가 몇 달에 걸쳐 가게 전체를 다 데코함. 사람들도 오면 우와 하고 할 정도로.

 

또 나는 추가 수당도 전혀 안 받으면서 퇴사 전 4개월 동안 세무 관리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이것 까지 내가 했었어야 했나 싶은데, 뭐 조금이라도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했었다. 근데 뭐 별로 알려주지도 않고 이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나오는 사장때문에 혼자 속앓이 많이함ㅋㅋㅋㅋ 본인은 회계사면서...ㅋㅋㅋㅋ

직원들 매주 주급 주는 것까지 내가 했었는데 큼지막한 부분은 대충 똑같으니 하면 되는데 세세한 부분까지는 내가 아는게 없어 힘들었다. 음 사실 저걸 무슨 생각으로 맡겼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좋은 직원들과 함께했던 회식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래서 퇴사는 어떻게 하게 되었었냐고?

위에서 말했듯이 언제나 내 친구와 사장은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고, 서로의 기분에 따라 혀 끝이 부드러워질 수도, 날카로워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뭐랄까 언제 녹을지 모르는 빙하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러던 와중에 둘이 한번 대판 싸웠다. 둘 다 잘 못한 부분이 있는 지라 딱히 누구의 편을 들고 싶지도 않다. 그냥 이번에는 둘 다 벼랑 끝에 있었고, 누구 하나 굽힐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내가 이 직장에서 더럽게 끝나지 않는 이상 퇴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기세를 틈타 내가 퇴사할 수 있기를 바랬고, 사장은 나를 친구의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둘 다 그만 두게 되었다. 그만 두는 날 사장이 노티스도 없이 바로 집 빼라고 해서 언니네 집에서 하루 머물고 운 좋게도 다른 쉐어하우스를 바로 구했다. 트램역이 가까운 곳이어서 학교 다니고 하기에 안성 맞춤이었다. 그리고 나는 미친듯한 자유와 행복감을 비로소 누릴 수 있었다. 편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이상 방 바깥에서 들리는 사장의 발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정말 정말 편했다. 그만큼 내가 그 집에서 쉬거나 자면서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식당 근처 호수의 노을이 정말 예쁠 때 찍은 사진

사람이 10년에 한 번씩 인생의 사이클이 돌고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던데, 나에게 있어 그 시기는 2020년이었던 것 같다. 2010년에도 기억에 남을 만큼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던 걸 보면 이게 또 희안하게 맞는다. (2000년에는 내가 다섯살이라 기억이 안남. 나 사주팔자 좋아해서 믿거나 말거나 이런거 잘 믿는편)

그렇게 격동의 힘든 시기를 겪은 해가 지나고 올해는 조금 괜찮았던 같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한식당을 그만 두고 난 후의 나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인다고 한다. 아마 인생이 그때 만큼 힘들어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던 걸 보면 이것보다 더한 고통이 와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든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똑똑하게,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살면서 더 이상 이러한 것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 없도록 인생의 보호막을 견고하게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나를 오랫동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잘 지켜 나갈 것이다.

여기까지 이 긴 글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도 아프지 말고 꼭 행복하길 바란다. 어떠한 무수한 바람이 당신을 흔들고 아프게해도, 그것은 금방 지나갈 것이고 당신은 더욱이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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