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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리의 Brunch ]/새아리의 호주 생활 일기장

#14 호주 워홀: 외국인 남자친구가 생겼다 - 3탄 [얼떨결에 받은 고백]

by 새아리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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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호주 워홀 : 외국인 남자친구와의 첫 만남-1탄 [데이팅 앱으로 남자친구 만난 썰]

데이팅 앱으로 호주 남자 친구 만나게 된 썰 1탄 오늘은 호주에서 만나 1년 가까이 연애를 하고 있는 현재 남자 친구를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실 나는 워홀로 호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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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남자친구 생긴 썰 - 3탄 [얼떨결에 받은 고백]

A와 연락 한 지 한 2주 정도가 되던 날이었나, 한식당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늦게까지 남아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나는 토종 호주인, 중국인, 호주에서 태어난 아시아인, 네팔인 등 여러 국적의 스태프들과 함께 일했는데, 그중 아무리 토종 호주인이라 하더라도 아시안인 경우에는 자라온 환경(부모님이 아시아인이고, 이민 1세대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나 같은 생짜 외국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그래서 더 쉽게 어울리고 친해질 수 있었는데, 애들이랑 함께 술을 마시면서 A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서양인들은 어떻게 이성관계를 시작하는지에 대해 궁금해져서 한 친구에게 도대체 너네는 얼마나 썸을 타야 서로를 애인이라고 지칭하니? 하고 물어보았다. 호주의 이성문화는 한국의 문화(1~2주 썸을 타다 눈치로 사인을 주고받고 '고백'을 하며 이성관계를 시작하는)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사람마다 개인 차는 있겠지만) 보통 1~3개월 정도는 여러 상황에서 만나보면서 시간을 갖는 편인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인생의 9할을 한국에서 자라온 나는 이 말을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데, 내가 야 한국에서는 2주 썸 타면 바로 사귀는데?라고 했더니 그러니까 너네 다 금방 헤어지잖아.라고 대답하더라. 그 말을 들은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나의 대학시절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의 시기를 돌아보니, 많은 커플들이 급속도로 생겨났다가 1년도 안 되어 헤어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보았던 것이다. 호주에서 나는 FOB(Friend of Benefit, 서로 합의하에 잠자리만 즐기는 관계)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꽤나 흔한 것 같더라. 확실히 성관계에 대해 쉬쉬하려는 한국과는 다르게(지금은 많이 바뀌고 있지만) 성욕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이고, 그래서 진지한 관계와 하룻밤만 지내는 관계의 분리가 명확하게 이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 친구 덕에 나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A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A에 대한 마음이 이미 진지한 상태였지만, A가 정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대놓고 물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지 않았기에, 그냥 편하게 이 좋은 감정을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했다.

여느 때와 같이 A와 연락을 하면서 지내다가, 일하던 한식당에서 주방에서 일하는 친구와 심하게 싸운 날이었다. 식당에서 일해본 분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주방과 홀은 친하게 지내기가 어려운 구조다. 그때는 내가 매니저고 그 친구가 헤드 셰프 였는데, 내 또래의 나이어서 부딪힐 땐 꽤나 부딪혔다. 더욱이 서로 성격이 정 반대라 갈등이 생기기도 쉬웠다. 그날은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 지점에 도달해 큰 언쟁이 났는데, 주변 스태프들도 내가 그렇게까지 화내는 건 처음 보는 모양인지라 다들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더 이상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지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퇴근을 했고, 집에 가서 A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전화로 이야기를 했다.

A는 괜찮냐며 위로를 해 주었고,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나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딱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보러 와 준다는 게 고맙고 좋아서 만나자고 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잠옷 차림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는데, 무거웠던 마음이 한 층 가벼워지고 위로가 되었다.

호숫가를 걸으며 이야기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부딪히고 있음이 느껴졌다. 예전에 스킨십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서인지 A는 나를 대할 때 항상 조심스럽게 대하고는 했었는데, 그날만큼은 그 아이가 정말 편하고 기대고 싶은 존재로 느껴졌다. 대화를 이어나가다 내가 먼저 팔짱 껴도 되니? 하고 물어봤는데, A는 반색을 하면서 당연하지. 사실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어.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하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예상치도 못하게 A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날 꽤나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관계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남자 친구 여자 친구 하는 거야?

A는 생각보다 굉장히 단도직입적이었다. 만난 지 딱 2주 정도 되는 날이었는데, 이건 아직 내 머릿속에는 없던 플랜이었다. 얘 분명히 우리 관계가 빠른 것 같다고 하지 않았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약간 어이없기도 했다. 이게 현실이 맞나 싶다가도 또 이게 현실인 게 명확하게 느껴져서 신기했다.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벤치에 앉아 그와 손을 잡고 어깨를 기댔는데, A가 옆에서 (정말이지)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었다. A는 정말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되었었는데, 왜 이렇게 성질 급하게 구는 건지 궁금해서 대놓고 근데 왜 이렇게 빨리 물어본 거야? 하고 물어보았다. A는 원래 제대로 하는 데이트 날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 일이 바빠지는 바람에 가까운 시일 내에는 데이 오프가 없는 상황이었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물어봤다고 했다. 사실 이때까지는 실감이 안 났었는데 그게 또 싫지는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친구의 조언을 듣고 혼자 마인드 컨트롤 하려고 노력했던 게 조금 괘씸하고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너 내가 빠르다며!  하고 종종 A를 놀렸다. 그때마다 A는 나도 어쩔 수 없었는걸. 하고 대답 하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봐줄 수밖에 없더라. A는 참 순수한 아이 같았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굳이 의심을 할 이유는 없었지만 만나면 만날 수록 그게 사실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로써 나의 연애사업은 3년만에 재개되었다. 길었던 휴업기만큼 나도 나이가 들어서 인지, 이번 연애는 정말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연애를 시작하면, 평소에는 평안하게 유지되던 감정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고, 기저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크고 작은 미성숙함이 수면 위로 떠올라 들춰질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에게 아주 작은 일로 서운함을 느낄 때마다 내가 미성숙한 것처럼 느껴져 자괴감이 들었고, 옛 연애의 아픔이 떠올라 무서웠다. 나는 아직도 참 갈 길이 멀구나, 하고 또다시 나의 자아는 낮아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A는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걸 채워주라고 파트너가 있는 거라며 힘 있는 위로를 줬다. 그의 옆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뭘 해도 이해받았으며, 나의 꾸질한 모습까지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나는 한국인 특성상 대화를 하지 않고도 눈치로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나쁜 습관이 있었는데, A 덕분에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기도 했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다가도 이성관계에 있어서는 유독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낮은 자존감에서부터 오는 걱정이 소통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 왔었다. 그런 나에게 A는 네가 무엇을 하던, 어떤 모습을 보여주던 사랑 할게 라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었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았다. 세상에 내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동생 정도 뿐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A 앞에서는 나는 100퍼센트 이상으로 '나'일 수 있었다. 이게 다 널 위한 거야, 라는 허울 좋은 명목 하에 내 행동과 말을 지적하고 가르치려 했던 옛 애인이 생각이 났다. 3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던 그는 아마 내 진짜 모습의 절반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10개월이 벌써 흘렀다. 나는 현재 A의 집에서 A의 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고, 지금은 벌써 모두가 진짜 가족같은 느낌이다. 예전에는 남자 친구와 같이 살면 많이 양보해야 할 부분도 많고 답답하고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지는 매일 같이 얼굴을 봐도 이 생활이 좋다. 나는 근 7년 간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 자취, 호주 워홀 등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기회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살림을 합쳐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 일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게 서로 사랑하고 양보하며 사는 삶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의 말처럼 '각자의 부족한 점은 서로가 채워주면 돼' 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니 갈등이 생길 일도 거의 없다. 결혼, 동거, 그동안은 나에게 너무나도 무서운 말로 다가왔었는데, 지금은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구나'하는 걸 어렴풋이는 깨닫게 되었다.  그만큼 현재까지의 삶은 평탄하고 행복한 편이다.

내가 외국인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데이팅 앱으로 만난 것 치고는 운 좋게 좋은 사람을 한 번에 만난 것 같다. 아마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아 인생에서 받을 수 있는 큰 선물 중 하나를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이제 호주 국경 문이 열리면서 다시 언젠가는 워홀을 신청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은데, 나처럼 국제 연애를 하게 된다면 (본인 선택이긴 하지만) 꼭 진중한 연애를 해 봤으면 좋겠다. 외국인으로서 현지인과의 교류는 호주 문화에 내가 더욱 더 빨리 스며들 수 있게 도와주는 치트키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이민자로서 혼자 살아가기 힘든 호주인데, 다들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한 호주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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